만성질환에 의한 빈혈은 단일 기전이 아니라, 염증이 철 이동을 차단하고 적혈구 생산을 억제하며 수명까지 단축시키는 복합적인 결과다.

❶ 생각해 보셨나요?

빈혈의 원인을 생각할 때 철분 부족, 비타민 B12 부족, 출혈, 용혈 등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중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는데 빈혈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성질환을 오래 앓고 있는 환자에게 설명되지 않는 빈혈이 있을 때가 그렇습니다.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 같은 자가면역 질환, HIV 같은 만성 감염, 암, 만성콩팥병, COPD 등 장기를 가리지 않고 어떤 만성질환이든 빈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성질환에 의한 빈혈(anemia of chronic disease)이라고 합니다.

❷ 염증이 철 이동을 막는 방식

만성질환들은 공통적으로 몸에 염증을 일으킵니다. 염증이 생기면 염증성 사이토카인(cytokine)이 분비되는데, 그 중 인터류킨-6(IL-6)가 간에서 헵시딘(hepcidin)이라는 물질의 생성을 늘립니다.

헵시딘은 세포 밖으로 철이 나오는 것을 차단합니다. 장에서 흡수된 철은 장세포가 가지고 있다가 조혈 기관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헵시딘이 그 경로를 막아버립니다. 늙은 적혈구가 파괴될 때 나오는 철도 마찬가지로 재활용되지 못하고 세포 안에 갇힙니다.

즉 몸 안에 철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철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해 마치 철결핍처럼 적혈구 생산이 줄어드는 상태가 됩니다.

❸ 염증이 적혈구 생산을 줄이는 다른 경로들

헵시딘 경로만이 아닙니다. 염증 상태에서는 추가로 세 가지 기전이 작동합니다.

  1. 백혈구 우선 생산 — 염증이 있으면 몸은 싸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골수에서 백혈구 생산을 우선시합니다. 상대적으로 적혈구 생산이 줄어듭니다.

  2. EPO 분비 억제 — 콩팥에서 만들어지는 EPO(erythropoietin, 조혈인자)는 골수를 자극해 적혈구 생산을 늘리는 역할을 합니다. 만성 염증은 이 EPO 분비를 억제해 적혈구 생산의 동력이 줄어들게 합니다.

  3. 적혈구 수명 단축 — 염증이 있는 환경에서는 적혈구의 수명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지면 빈혈이 심해집니다.

❹ 결론적으로

만성질환에 의한 빈혈은 이 네 가지 기전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복합적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철분을 보충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헵시딘을 억제하는 치료도 연구되고 있지만 아직 임상에서 쓰이지는 않습니다.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에서 빈혈이 발견된다면, 원인을 성급하게 철결핍으로 단정짓기 전에 만성질환에 의한 빈혈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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