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네프린이 아나필락시스의 유일한 1차 치료제임을 알면서도 임상에서 투여가 지연되는 현상을 에피네프린 역설(epinephrine paradox)이라 하며, 그 원인을 이해하고 미리 대비해야 한다.

❶ 생각해 보셨나요?

아나필락시스가 오면 에피네프린을 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의료인은 없다. 그런데 알레르기 내과 교수도 “에피네프린을 실제로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아나필락시스 사건은 진료실 밖, 응급 상황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는 것과 막상 그 순간 주저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❷ 임상에서 투여가 지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피네프린 역설이 생기는 데는 몇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진단이 애매하다. 전형적인 아나필락시스는 진단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지러움, 구토, 복통만 있으면 급체나 식중독으로 보이기 쉽다. 천식 환자에서 호흡 곤란이 오면 천식 발작으로, 불안감이 크면 공황 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에피네프린까지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더 솔직히 말하면, 에피네프린 쓰기가 무서워서 “아나필락시스가 아닌 이유”를 머릿속에서 찾게 된다. 이 함정을 피하는 방법은 아나필락시스 진단 기준을 정확히 숙지하고, 애매하면 아나필락시스로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 부작용을 과도하게 우려한다. 에피네프린의 심혈관계 부작용, 부정맥, 혈압 급상승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부작용들은 주로 정맥으로 급속 투여했을 때 발생한다. 근육 주사 0.3~0.5mg은 안전하다. 투여 후 두근거림, 떨림, 창백함이 생기는 것은 β1 수용체 작용으로 인한 예상된 반응이며, 이것이 심각한 부작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 보조 약물을 먼저 쓰고 지켜본다.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를 먼저 투여하고 반응을 봐서 좋아지지 않으면 에피네프린을 쓰겠다는 접근은 잘못됐다. 이 약들은 증상을 완화할 수 있지만 혈압 저하와 기도 폐쇄를 막지 못한다. 보조 약물로 두드러기가 줄어들어도 아나필락시스는 진행 중일 수 있다. 에피네프린을 먼저 투여한 뒤 보조 약물을 추가하는 순서가 맞다. 보조 약물을 이미 먼저 투여했더라도, 아나필락시스라고 판단되면 그 순간 에피네프린을 투여하면 된다.

넷째, 경험 부족이다. 처음 쓰는 약 앞에서는 당연히 손이 주저된다.

❸ 경험 없이도 주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피네프린을 실제로 써 본 적이 없더라도 준비는 할 수 있다. 지금 근무하는 곳에 있는 에피네프린을 한 번 꺼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표준 농도는 1:1,000, 성인 용량은 0.3~0.5mg, 경로는 허벅지 외측 근육 주사. 이 세 가지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해 두면, 실제 상황이 왔을 때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머릿속 시뮬레이션과 실제 약물 확인을 미리 해두는 것이 에피네프린 역설을 극복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다.

❹ 그래서

에피네프린의 이득은 아나필락시스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근육 주사의 위험은 두근거림, 떨림 정도다. 이 둘의 크기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진단이 애매할 때 에피네프린을 쓰고 나중에 “필요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망설이다가 “필요했는데 늦었다”는 것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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